[증권가 이모저모] 호국 금융인 원국희
(서울=연합인포맥스) ○…호국정신을 기념하는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면 증권가에서 기억될 사람이 있다.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원국희 신영증권 전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1933년 경기도 부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원국희 전 회장은 만 17세 때 군대로 차출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다섯 달 가량 지난 1950년 12월이었다. 연합군 덕분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선을 압록강까지 높였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패퇴하는 상황이었다.
대구 신병훈련소에서 보름 동안 겨우 총 쏘는 법 정도 익혔던 인천상업중학교 4학년생 원 전 회장은 곧바로 춘천중동부전선에 투입됐다. 강원도 횡성군·경기도 가평군·강원도 인제군 등이 원 전 회장이 거쳤던 전장이다.
원 전 회장은 지난해 한 언론 기고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나서야 했으므로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며 "함께 싸우다 비명에 스러져 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잠 못 이룰 때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 등 주요 기념일 때 그가 매년 한국전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화환을 보내는 배경이다.
1951년 8월 전투 중 파편상을 입고 9월에 제대한 원 전 회장은 "생사를 초월한 경험이 창업과 경영에도 도움이 됐다"고 돌아봤다.
1957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건설사 대림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원 전 회장은 2년 뒤 계열사인 서울증권으로 옮겨 증권가에 첫발을 디뎠다. 1971년 퇴사 후에는 서울대 상대 동문 등 7명과 500만 원씩 출자해 마련한 3천500만 원으로 신영증권을 인수했다.
정부가 자본시장육성책을 시행하는 만큼 증권산업에 가능성이 있다는 게 원 전 회장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신영증권은 정부 정책의 시행으로 큰 수익을 올렸고, 자본금을 3년 만에 10배 이상으로 불렸다.
특히 신즉근영(信卽根榮·신뢰가 곧 번영)이라는 신영(信榮)증권의 철학을 강조하는 원 전 회장에게 고객은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원 전 회장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기보다 명동지점에 나가 고객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고, 직원들과 설렁탕도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메모지는 언제나 이면지를 사용했고, 자가용차를 업무용으로 활용하며 회사 비용을 아꼈던 원 전 회장은 주주들에게도 믿음을 줬다.
"대형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근검절약해 이익을 많이 내고 직원을 잘 대우하고 투자자에게 배당을 많이 주는 회사가 마음 편하고 좋은 회사 아닙니까"
몸집 불리기보다 내실을 우선하는 경영 스타일은 1990년대 초반 증권 거품 붕괴 때 유효성을 입증했다. 1980년대 증권 대호황으로 경쟁 증권사가 증자와 증원, 점포 늘리기에 매진해도 신영증권은 동요하지 않았고, 시장이 충격을 받았을 때 흑자 경영을 이어갔다. 신영증권의 흑자 기록은 지난해까지 53년째다.
신영증권의 경영방식은 대외적으로 인정 받아 증권업계 최초로 94년·95년·96년에 3연속 최우수 증권사로 꼽혔고, 원 전 회장은 1996년에 금융발전유공자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정부가 원 전 회장을 금융산업 선진화에 기여한 원로 금융인으로 선정했던 것이다.
원 전 회장은 금융업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난 2014년에 업계 최초로 통일펀드를 선보인 게 하나의 사례다. 6·25로 전쟁의 아픔을 체감했던 그가 평화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게 전쟁"이라는 게 원 전 회장의 생각이다.
전쟁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지킨, 금융업에서는 사명감으로 일한 원국희 신영증권 전 회장의 이름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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