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지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정치학
  • 일시 : 2025-08-18 09:00:00
  • [뉴욕은 지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정치학



    (뉴욕=연합인포맥스) 미국 뉴욕시의 맨해튼은 알려진 대로 '마천루의 도시'다. 스카이스크래퍼센터에 따르면 2025년 기준 맨해튼에는 높이가 200미터 이상인 빌딩만 98개에 달하고 400미터가 넘는 빌딩도 7개에 달한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100년 가까운 역사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SB),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인 원 밴더빌트 애비뉴 등이 맨해튼 미드타운부터 다운타운까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 마천루들이 서울 종로구 크기에 밀집돼 밤낮으로 장관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ESB는 여전히 뉴욕에서 첫 손에 꼽히는 마천루다. 1931년 개장한 이후 약 100년간 많은 마천루가 맨해튼에 생겨났지만 ESB는 지금도 '뉴욕의 상징'을 논할 때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ESB의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리는 뉴욕인 만큼 각계각층이 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ESB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ESB는 공식적으로는 정치 캠페인 등을 위해 조명을 활용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ESB의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빌딩 외관에 조명을 쏘기 위해선 '라이트닝 파트너(lightning partner)'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때 "정치 캠페인, 종교적 행사, 상업적 또는 개인 이벤트는 원칙적으로 제외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에 관해 공적 의사나 연대 의식을 표현할 때 ESB의 조명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22년 2월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ESB는 파란색과 노란색 조명으로 건물 외관을 감쌌다. 우크라이나와 연대하는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국기색 조명을 활용한 것이다.

    2023년 10월에는 ESB의 상층부와 첨탑이 이스라엘 국기에 쓰이는 '다크 스카이 블루'와 흰색으로 뒤덮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침공하며 이스라엘 국민들을 학살하자 이스라엘 국기색 조명이 쓰인 것이다. 특히 이 때는 맨해튼 전역의 주요 빌딩이 모두 다크 스카이 블루를 건물 외벽에 비추면서 뉴욕에서 유대인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드러내기도 했다.

    ESB는 이같은 조명 활용에 대해 정치 캠페인이라기보단 국제적 위기에 대응하는 인도주의적 연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정 국가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희생과 전쟁을 반대하는 인류애적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미국 정재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주요 기관이나 기업, 단체들도 공적 의사를 표하기 위해 ESB의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뉴욕인 만큼 뉴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광고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8월 15일 주황색과 흰색, 녹색으로 덮인 ESB였다. 이날은 '인도 독립기념일(India Day)'로 ESB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인도 국기색으로 외관을 장식했다.

    [출처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엑스 계정]


    여기에는 미국 내 대표적 인도계 커뮤니티 'FIA(Federation of Indian Association)'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초 뉴욕주와 뉴저지주, 코네티컷주 등 이른바 '트라이 스테이트' 지역의 인도계 단체들로 구성된 FIA는 2014년 이후 매년 인도 독립기념일에 맞춰 ESB에 인도 국기색 조명을 띄운다.

    이는 단순히 ESB에 조명을 쏘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FIA와 ESB의 장기 파트너십은 '세계의 수도' 뉴욕 내 인도 커뮤니티의 위상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사례로 여겨진다. FIA는 이날을 전후해 맨해튼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인도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도 진행하며 자신들의 독립을 축하하고 인도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알리고 있다.

    올해 8월 15일 ESB를 바라보면서 더욱 아쉬웠던 것은 우리나라도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날 뉴욕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는 광복 기념 영상들이 표출됐지만 ESB가 상징하는 바를 고려할 때 미국과 뉴욕에서 아직 우리나라가 갈 길이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우리의 광복을 우리만 온전히 즐겨도 될 일이다. 굳이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에서 공감과 인정을 얻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뉴욕이 전 세계인의 각축장이 된 이상 우리도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일이다. 8월 15일 대한민국도 독립했었고 이만큼 성장했다고 뉴욕을 통해 알리는 게 또 다른 외교의 한 방법이 아닐까. (진정호 뉴욕특파원)

    jh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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