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권의 미래한국] 턴베리 체제
  • 일시 : 2025-09-10 10:10:00
  • [경희권의 미래한국] 턴베리 체제



    군 입대 전 이후로 17년 만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일정은 바티칸 투어였는데,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천지창조)와 벽화(최후의 심판)가 자리한 시스티나 성당을 둘러보았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가운데, 다시금 과거 서구 문명의 중심이었던 가톨릭 신정(神政) 체제의 위력을 실감했다.

    미국 국회의사당(Capitol)은 겉에서 보기에는 원형 돔 건물 즉, 로턴다(Rotunda) 구조 때문에 마치 성당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티칸과는 달리 '인민의 정부'를 수립하였으므로, 인간들의 동상이 내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혁명은 1786년이고, 나폴레옹으로 촉발된 프랑스 및 유럽 주요국의 공화정 시도가 1800년대 초를 주름잡았으니, 그때부터 세상은 실로 근본적 세계관과 패권국이 크게 변화하는 시대가 열렸다. 첨언하면, 이탈리아에서 공화정 시도가 실패한 후의 시대상을 담은 오페라가 푸치니의 토스카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1991년 12월 26일) 이후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현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는 냉전의 종식 시점 이래 미국이 승리감에 도취해 국력의 근본이었던 제조업 역량을 안보와 국가전략을 도외시한 채 비용이 저렴한 국가로 들어 옮기고, 중국처럼 이념적 대립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무역 체제에 편입시키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로 진화할 것이라는 순진함(Naivete)으로 자기 무덤을 팠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미국의 단극 체제는 끝난 것일까. 신의 시대에서 인간, 혹은 미국의 시대에서, 이제 다극 체제 혹은 중국·러시아가 대표하는 권위주의 패권의 시대로 우리 세계인의 역사는 나아가게 되는 것일까.

    여러 소회를 느끼던 도중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인 제이미슨 그리어의 '턴베리 체제(Turnberry System)' 혹은 '트럼프 라운드(Trump Round)'선언 관련 기사가 핸드폰을 여러 번 울렸다. 그리어는 다시금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해 유럽연합(EU)과 손을 맞잡고 세계 무역 질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노라 다짐했다. 한국, 일본,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캄보디아, 영국 등과의 무역협정에 이어 대서양 무역(Trans Atalantic Trade) 즉, 턴베리 협정 체결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 체제, 세계무역기구(WTO) 시스템은 종료되었다는 일방적 통보다. 더불어 그는 지금까지 미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한 국가들의 대미 투자 예상 금액이 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서도 마셜 플랜의 10배라고 밝혔다.

    아직 세부 사항이 결정되진 않았지만 유럽연합 전 회원국은 미국의 제조업 상품에 대해 0% 관세를 적용하고, 7천500억 달러의 에너지 구매와 6천0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유럽연합이 이 정도까지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바티칸 투어 가이드의 이탈리아 현지 사정 설명에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이탈리아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 기준 38세, 중위소득 월급으로는 로마 시내 괜찮은 집 월세를 내기도 어렵다고 한다. 유럽이 세계의 박물관, 혹은 더 자기비하적으로 동물원 비슷하다는 즉, 유적지 입장료를 받고 근처 숙박과 요식업 말고는 젊은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공장과 연구소들이 더 이상 사라진, 과거의 영광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쇠락의 시대라는 세평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이탈리아, 스위스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필자는 이곳 젊은이들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밀라노, 베른의 밤거리에서는 홀로 스마트폰 앞에서 열심히 춤을 추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과 손짓 발짓해가며 힙합 가사를 부르는 젊은 남성과 소년들을 보았다. 레스토랑과 호텔에서는 백인이 아닌 북아프리카, 터키 등지 출신의 이민자들을 보았다. 고국에서 꿈을 잃은 사람들과 꿈을 찾아 먼 길을 떠나 도착한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무언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올해는 1300년에 시작해 25년마다 돌아오는 바티칸의 희년(Jubilee)이다. 특별한 은혜를 받는다는 금년 5월 8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 출신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레오 14세(LEO XIV)라는 이름을 택하며 교황으로 선출됐다. 턴베리 체제로 대표되는 신(新) 국제정치와 세계 무역 질서가 시작되고, 레오 14세의 즉위로 가톨릭 역시 전환기를 맞은 지금, 한국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잠들어 있던 미국과 유럽이 무언가 새로운 각오로 나선다는 생각에 자못 긴장과 불안감이 깊숙이 스며든다. 어쨌든 희년에는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주고 앞날을 축복해 준다고 한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세계사의 큰 격동기를 맞이한 지금, 한국의 앞날을 위해 기도해 본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undefined




    <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주의사항
    ※본 리포트는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외부기관으로부터 획득한 자료를 인용한 것입니다.
    ※참고자료로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