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두의 금융나침반] 금융은 사라지고, 경험만 남는다
  • 일시 : 2025-10-22 10:10:00
  • [손병두의 금융나침반] 금융은 사라지고, 경험만 남는다



    언젠가부터 은행에 직접 갈 일이 사라졌다. 송금은 몇 초, 대출은 몇 번의 클릭이면 충분하다. 단순히 편리해진 것만이 아니다. 지금 금융은 기술을 매개로 자기 정체성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는 '은행 앱이 있는지도 모른 채' 일상이 흘러갈 걸로 보인다. 금융이 점점 '의식되지 않는 무언가'로 되어갈 거란 얘기다.

    과거에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카드로 결제하고, 지점을 방문해 설명을 듣는 일'이 금융이었지만, 점점 그 모든 것들이 다른 산업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모빌리티 앱이 자동차보험을 설계하고, 유통 앱이 신용을 평가하고, 택시 앱이 결제를 완결한다. 금융이 금융 밖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임베디드 파이낸스(Embedded Finance)'라고 표현한다. 번역하면 '내장형 금융'쯤 되겠지만, 실제 의미는 더 넓다. 금융이 더 이상 독립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고객의 경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방식을 말한다. 예컨대, 무언가를 결제하거나 상품에 가입하거나 할 때, 사용자는 더 이상 '금융 행위를 한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경험의 흐름 위에서 자연스럽게 금융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객의 기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객은 디지털 서비스에 익숙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무언가를 결제할 때 예전처럼 카드번호를 직접 입력하지 않아도 되고, 택시를 타고 내릴 때도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보험에 가입할 때도 긴 설명을 읽지 않아도, 앱이 자동으로 추천해주는 걸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고객은 이제 '기능을 작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이 돼가고 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하지?', '원하는 기능을 왜 이렇게 찾기 어렵게 해놨지?', '왜 내가 입력을 두 번이나 해야 하지?' 고객은 점점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술은 이 질문에 응답한다. 더 적은 입력, 더 빠른 속도, 더 낮은 수수료, 그리고 무엇보다 '내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한' 직관적인 설계. 기능보다 경험이 선택받는 시대, 금융도 예외일 수 없다.

    결제는 대표적인 사례다. 카드를 긁는 건 1초면 되지만, 실제로 돈이 가맹점 통장에 도착하려면 하루 이틀이 걸린다. 그 사이 여러 기관을 거치고, 각각 수수료가 붙는다. 고객은 모른 채 지나가지만, 가맹점 사업자는 적잖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 문제를 바꾸겠다고 등장한 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디지털 기반으로 발행되지만, 원화나 달러 등 실물자산과 일대일로 가치를 고정한 디지털 화폐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널뛰지 않고, 전송 속도는 훨씬 빠르다. 결제도 정산도 실시간으로 끝내고, 수수료는 몇십분의 일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기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돈이 단순한 지급수단이 아니라, 조건과 기능을 가진 프로그래머블 머니로 바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정 날짜가 되면 자동으로 송금되는 돈,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환불되는 구조, 특정 장소나 목적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돈. 복지, 보험, 기업정산, 포인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설계된 돈'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다만 모든 기술이 항상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어떤 기술은 오히려 새로운 마찰과 피로감을 만들기도 한다. 기술은 빠르지만,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디지털 금융이 진짜로 '성공'하려면, '기술을 감추는 기술'이 필요하다. 고객이 직접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동하게 만드는 설계. 고객이 선택의 부담을 덜 느끼게 만드는 흐름. 디지털 전환은 결국 '화려함'이 아니라 '단순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금융의 최종 목적은 결국 인간의 문제를 푸는 데 있다. 위험을 나누고, 기회를 확장하며, 삶을 안정시키는 일. 그런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더 나은 방식, 더 나은 구조, 더 나은 경험으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의 금융은 더 보이지 않을 것이고, 더 의식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금융 같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금융은 사라지고, 경험만 남는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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