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백전' 꺼내든 한은…스테이블코인發 '화폐 붕괴' 경고
141쪽짜리 스테이블코인 백서 배포…7가지 위험 제시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미 기자 = 한국은행이 스테이블코인의 혁신성과 잠재력은 인정하면서도 '신뢰 없는 혁신'이 불러올 리스크를 강하게 경고했다.
한은은 27일 141쪽 분량의 보고서 '스테이블코인의 주요 이슈와 대응방안'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과 관련해 "기술보다 신뢰가 우선돼야 한다"며 7가지 위험 요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이 기존 지급결제 인프라를 혁신할 수 있는 잠재력은 있지만 중앙은행이 아닌 민간이 발행하는 '화폐'인 만큼 "기술이 아니라 신뢰로 작동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번 보고서는 한은이 그동안 스테이블코인 이슈에 대응해온 내용과 함께 조사 및 연구 내용을 종합적으로 포함한 '백서'로 볼 수 있다.
보고서는 "1코인은 1원이라는 약속이 깨지는 순간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화폐가 아니다"며 19세기 미국 자유은행제와 조선시대 당백전 사례를 들어 신뢰 없는 화폐의 붕괴를 경고했다.
자유은행제는 19세기 미국에서 주정부 허가만으로 민간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도록 했으나, 신뢰부족으로 화폐 가치가 제각각이 되며 혼란을 초래한 제도다.
조선 고종 시기 정부는 재정난을 메우기 위해 기존 동전의 100배 액면가를 붙인 당백전을 발행했지만 실제 가치가 뒷받침되지 않아 물가 급등과 경제 혼란을 불러왔다.
보고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시 ▲디페깅(Depegging) ▲디지털 뱅크런 ▲소비자 보호 공백 ▲금산분리 훼손 ▲외환 규제 우회 및 자본유출 ▲통화정책 약화 ▲금융중개 기능 약화 등 7가지 핵심 위험을 제시했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인 USDT와 USDC조차 시장 불안시 1달러 가치가 무너진 사례를 제시하며, "스테이블코인은 중앙은행 제도 밖에서 화폐의 단일성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유통량이 적은 비(非)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변동성은 더 크며, 유로 스테이블코인(EURC)은 "대부분 기간 유로 가치보다 낮게 거래됐다"고 지적했다.
코인런은 은행 뱅크런보다 훨씬 빠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SVB 사태 당시 써클의 USDC는 단 하루 만에 시가총액의 18%가 환매 요청으로 빠져나갔다.
클릭 한 번으로 동시다발적 환매가 가능한 만큼, 충격은 "가상자산을 넘어 전통 금융시장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소비자보호 공백도 지적했다.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자보호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중앙은행이 최종대부자 역할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은은 "국가가 보증하지 않은 '사적 계약'이 붕괴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IT·유통기업 등 비은행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경우 사실상 '내로우뱅킹'을 허용하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금산분리 원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특히 빅테크가 자체 결제망과 결합해 플랫폼 내 독점력을 강화할 가능성을 경고하며 "비은행 발행은 금산분리 원칙 위배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개인 지갑으로 옮겨 달러 코인으로 바꾸고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
보고서는 "익명성이 강화된 블록체인 생태계에서는 자금세탁·불법 송금이 용이하며, 2024년 전 세계 불법 가상자산 거래의 63%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준비자산을 매입하면 단기금리를 낮추고, 코인런 시 대규모 자산 매각은 금리를 급등시켜 통화정책의 파급효과를 약화시킨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은은 "금리정책의 전달 경로가 취약해지고 물가·금융안정 목표 달성이 어려워진다"고 했다.
이어 스테이블코인 확산이 은행 예금 이탈로 이어져 대출여력이 줄어들고, 자금중개 기능이 비은행·탈중앙화 금융(DeFi)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자금조달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한은은 달러화 중심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감안할 때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제결제 수단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비중이 99.7%에 달하고, 유로조차 1% 미만"이라며 "국내에서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원화를 대체할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24시간 실시간 결제 인프라와 낮은 카드 수수료 구조를 갖추고 있어 "스테이블코인이 실물거래에서 추가적인 효용을 제공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가상자산 발행(ICO)이 금지된 국내 제도 환경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실질적 활용처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한은은 "혁신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설계하자는 이야기"라며, 비은행이 아닌 은행 중심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은행은 이미 자본·외환규제를 준수하며 한국은행 금융망 내에서 결제하기 때문에 금융안정과 통화정책과의 조화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또 한은은 '예금토큰 상용화'를 병행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예금토큰은 은행 예금을 블록체인 상에서 토큰화한 형태로, 스테이블코인의 기술적 장점을 살리면서도 자본·외환규제를 우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공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평가했다.
한은은 "예금토큰과 은행 주도의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병존할 때 민간 혁신과 공공 신뢰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도 신뢰가 없다면 화폐는 작동하지 않는다"며, 최근 페이팔의 PYUSD 오발행(300조달러 규모 오류) 사례까지 언급하며 "기술적 결함 가능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은은 "화폐의 진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이며, 혁신과 신뢰의 조화를 위한 제도 설계가 시급하다"며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smjeong@yna.co.kr
<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주의사항
※본 리포트는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외부기관으로부터 획득한 자료를 인용한 것입니다.
※참고자료로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