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두의 금융나침반] 스마트한 돈, 프로그래머블 머니가 온다
  • 일시 : 2025-12-03 10:10:01
  • [손병두의 금융나침반] 스마트한 돈, 프로그래머블 머니가 온다



    돈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였다. 주머니에 넣어두든, 은행에 예치하든, 돈은 가만히 있었다. 필요할 때 꺼내 쓰고, 목적에 따라 흘러가는 건 사람이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등장하는 새로운 돈은 다르다. 이 돈은 조건이 걸리고, 기능이 내장돼 있으며, 스스로 움직인다. 마치 '소프트웨어처럼 작동하는 돈', 이른바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다.

    말은 낯설지만, 원리는 단순하다. "이 돈은 매달 10일에 자동으로 송금돼야 한다", "이 돈은 의료비에만 사용할 수 있다", "이 돈은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 환불돼야 한다"와 같은 규칙을 미리 심어둔 돈이다. 사용자가 명령하지 않아도 정해진 로직에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기존에도 자동이체, 정기결제 같은 기능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설정한 시스템'이었다. 반면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돈 자체가 로직을 품고 있다. 그래서 더 유연하고 더 복잡한 조건을 소화할 수 있다.

    정부가 지급하는 복지금, 지방자치단체의 지역화폐, 회사의 복지포인트, 보험사의 지급금 정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돈이 어떤 조건에만 쓰이게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자동 회수되게 하거나, 특정 상황에서만 발동되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예산 낭비를 줄이고, 관리 비용을 절감하며, 집행의 투명성도 높일 수 있다.

    기업 영역에서도 가능성은 크다. 외주비용이나 프로젝트 예산을 지급할 때, 계약 달성 여부를 기준으로 자동 집행하게 만들면 정산 과정이 간소화된다. 핀테크 기업들은 이 로직을 스마트컨트랙트(smart contract)라는 형태로 구현하게 될 것이다. 프로그래밍된 계약서가 조건 충족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돈을 움직인다. 수많은 지출과 정산, 보상과 지급이 사람 없이 이루어지는 구조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변화는 피부에 와닿는다. 이미 많은 결제 시스템에서 자동 정산이 기본값이 되고 있다. 택시를 타고 내릴 때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요금이 빠져나가고, OTT 구독료가 특정 날짜마다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프로그래머블 머니가 여기에 적용된다면, 예를 들어 소득이 줄어들면 자동으로 소비 예산이 조정되고,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교육비 예산이 새로 설정되는 구조도 가능하다. 개인 맞춤형 금융설계가 자동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기술의 기반이 되는 것은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화나 원화 등 실물자산과 1대 1로 가치를 고정한 디지털 화폐다. 변동성이 적고, 전송 속도가 빠르며, 무엇보다 스마트컨트랙트를 적용할 수 있다. 비트코인이 투자의 대상이었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돈'에 가깝다.

    해외에서는 비자, 스트라이프, 페이팔 등이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망을 실험하고 있다. 비자의 경우 미국에서 발행한 USDC(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를 '비자 다이렉트'라는 송금플랫폼에 연동해 다국적 결제에 사용하고, 즉시 정산 및 환율 자동 반영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기존의 은행간 망이나 카드 정산망보다 훨씬 간단하고 빠르다. 수수료도 낮다.

    여기에 프로그래머블 기능이 더해지면, 특정 기업 고객만을 위한 할인, 특정 날만 적용되는 환급 조건, 연체 시 자동 경고 발신 등 다양한 기능이 돈에 심어질 수 있다. 금융과 마케팅, 회계와 소비가 한데 엮이는 새로운 구조가 생겨나는 셈이다.

    물론 아직은 기술적·제도적 한계도 많다. 한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활용에 대한 제도 논의가 아직 진행 중이다. 본격적으로 보급되기까지는 인프라와 소비자 신뢰도 확보돼야 한다. 무엇보다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설계 책임이 크다. '자동'이 잘못 작동하면 회수나 변경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은 막기 어렵다. 돈이 더 정교해지고, 더 적은 마찰로 흘러가며, 더 많은 조건과 맥락을 반영하게 되는 것. 결국 돈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어떻게 설계하고, 어디에 적용하며, 누구에게 이득이 돌아가게 할 것인가.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단순히 신기한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드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복지의 정확성, 예산의 투명성, 소비의 책임성까지 모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돈의 '모양'을 바꾸었다. 이제는 돈의 '성격'까지 바꾸고 있다. 아무 기능도 없던 돈이, 똑똑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돈이 움직이는 방식을 설계하는 것이 바로 앞으로의 금융이 해야 할 일이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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