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지금] 왜 유독 영국 국채만 '패대기' 당했을까
  • 일시 : 2026-03-30 08:00:04
  • [뉴욕은 지금] 왜 유독 영국 국채만 '패대기' 당했을까



    (뉴욕=연합인포맥스) 이란을 둘러싼 이번 중동 전쟁이 발발한 이후 금융시장의 화두는 단연 에너지 가격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는 것은 상식적인 흐름이다. 원유 공급망 교란으로 물가 공포가 커지고 각종 산업에 충격파가 미치는 만큼 주가와 채권가격이 급락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범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왜 유독 그 정도로 무너지는지 의아한 자산이 하나 있었다. 영국 국채(길트)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주요국 채권시장이 모두 주저앉았지만, 영국은 말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인포맥스의 해외금리 현재가 화면(화면번호 6531) 기준으로 보면 길트 2년물 금리는 3월 한 달간 97.5bp 폭등했다. 유럽 주요국인 프랑스의 2년물 국채금리도 75.7bp, 독일 국채(분트) 금리도 67.3bp 급등하긴 했으나 길트 금리 상승폭은 남다르다.

    3월 기록한 최고점 기준으로 보면 차이는 더 확연하다. 2년물 기준 이번 달 길트 금리는 125bp까지 상승폭이 벌어졌었다. 분트가 78bp, 프랑스 국채가 84bp, 미국은 65bp였던 것을 감안하면 영국 시장은 확실히 예민했다.

    금리 압박은 장기물 구간에서도 나타났다. 30년물 기준 3월에 길트 금리는 54.2bp나 뛰며 분트(22.6bp)와 프랑스 국채(39.1bp)를 크게 웃돌았다. 유럽 주요국 중 30년물 금리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를 웃돈 곳은 영국뿐이다.

    길트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한 주된 이유는 통화정책 전망이 급격히 변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가 27일(현지시간)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말 영국 기준금리에 대한 시장 내재 기대치는 이달 초 이후 115bp나 폭등했다. 통화정책 전망치는 연말까지 약 50bp 인하에서 60bp 인상으로 급격히 돌아섰다.

    골드만의 코시모 코다치-피사넬리 유럽·중동 금리 상품 매니징 디렉터는 "이것이 과도하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럴 것"이라며 "잉글랜드은행(BOE)이 현재의 에너지 충격에 금리인상으로 대응하더라도 현재 경제 궤적을 고려하면 이는 일종의 정책적 실수가 될 가능성이 크고 향후 성장에도 분명히 부정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동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시장은 BOE가 동결 신호를 낼 것으로 예상했으나 BOE는 예상보다 더 빠르게 금리인상에 열려 있다고 시사했다. 금리인하 기조에 있던 BOE가 동결 과정 없이 곧장 인상 조짐을 내비치면서 시장이 다급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코다치-피사넬리는 "재정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금리를 인상한다면 소비자 가격 충격과 수요 저하를 심화시켜 성장에 매우 부정적일 것"이라며 "반면 영국 정부가 재정 준칙을 깨고 실질적 재정 패키지를 내놓으면 성장 충격은 일부 완화하겠지만 금리 환경은 다시 매우 약세(채권금리 상승)로 돌아서고 국채시장의 발작 가능성이 다시 거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BOE가 급격히 금리인상 기조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배경의 근저에는 영국의 에너지, 특히 천연가스 취약성이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영국 에너지 안보 및 탄소중립부(DESNZ)에 따르면 현재 영국의 가스 저장 용량은 약 32억세제곱미터다. 이는 영국 평균 소비량 기준으로 18.8일분에 불과하다. 혹한기 가스 사용량 기준으로는 6.7일분에 불과하다.

    반면 유럽 주요국은 훨씬 많은 천연가스를 비축해두고 있다.

    호주 에너지 전문 매체 디스커버리얼러트에 따르면 평상시 기준 프랑스의 천연가스 비축분은 103일분, 독일도 89일분에 달한다. 네덜란드도 74일분을 비축해두고 있다.

    영국이 유럽 주요국과 비교해 가스 비축분이 월등히 작은 이유는 '저수지(reservoir)' 모델이 아니라 '강(river)' 모델을 택했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 국가들은 주로 소금 동굴 저장 방식으로 지하 저장 시설을 개발해왔지만 영국은 지질학적 특성상 최적의 저장 부지가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국제 파이프라인을 통해 즉각 수입하는 방식으로 천연가스 수요를 맞춰왔다. 영국의 가스 수입 의존도는 62%에 달한다.

    그런 만큼 영국은 에너지 위기가 발생하면 즉시 충격받는 구조다. 유럽 대륙 국가들은 비축분을 사용하며 3개월 가까이 버틸 수 있지만 영국은 가격을 불문하고 국제 현물 시장에서 가스를 당장 구입해야 한다.

    게다가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생산 국가인 카타르가 이란의 공습을 받으면서 한국과 중국 등 일부 국가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한 것도 악재다. 카타르산 LNG 확보가 어려워진 한국과 일본 등은 미국산 LNG 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현재 LNG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영국은 한국 및 일본 등과 입찰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하필 3월에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한 점도 영국 기업엔 불운이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가계용 에너지 요금에 가격 상한제를 적용하지만 기업용 에너지에는 이같은 보호 장치가 없다. 문제는 영국 기업 중 약 3분의 1이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4월 1일에 맞춰 에너지 계약을 갱신한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으로 이들은 폭등한 가격으로 연간 에너지 계약을 갱신하게 됐다. 이는 기업, 나아가 영국 경기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 따르면 유럽 천연가스 시장의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선물 근월물은 메가와트시(MWh)당 54.175유로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달에만 70% 폭등했다. (진정호 뉴욕특파원)

    jh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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