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오르는데 정부는 적극재정…'폴리시 믹스' 시험대
기획처 장관·한은 총재 회동 사상 처음…취임 20여일 만에 재정당국 수장 모두 면담
(서울=연합인포맥스) 김학성 기자 = 국제유가 급등으로 물가 상방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정부가 확장적 재정 기조를 강조하면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방정식이 복잡해지고 있다.
오는 28일 신현송 총재가 주재하는 첫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를 앞두고 '폴리시 믹스(policy mix·정책 조합)'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현송 총재는 14일 오전 중구 한은 본관에서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과 회동했다. 옛 기획처 시절을 포함해 기획처 장관이 한은 총재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회동에서 두 사람은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앞서 신 총재는 취임 이틀 만인 지난달 23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도 자리를 함께했다. 여기서 신 총재는 "성장과 물가가 상충하는 상황에서 정책이 조화롭게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신 총재는 취임 20여일 만에 재정당국 수장들과 모두 면담하며 접촉면을 넓혔다.
신 총재의 이 같은 행보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물가와 성장을 둘러싼 긴장이 있다. 최근 이란 전쟁 여파로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한은의 금리 인상 사이클이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받고 있지만, 정부는 확장적 재정정책 기조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 긴축은 경기를 가라앉히지만, 확장 재정은 반대로 경기를 부양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무회의에서 "지금은 투자를 통해서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시기"라며 "적극 재정을 통해 국민 경제 대도약의 발판을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적극적 재정정책으로 잠재성장률과 생산성을 높이면 세입 기반이 확대되고 부채비율도 장기적으로 낮아지는 선순환을 실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례 없는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성장률 자체는 양호하지만, 'K자 양극화' 심화로 경제 전반에 온기가 고르게 퍼지지 않는 만큼 재정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문제는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소비자물가가 한은 목표치(2%)를 웃돌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6%로 21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2월 2.0%까지 내려갔던 상승률은 3월 2.2%로 반등한 데 이어 4월에는 국제유가 상승분이 본격적으로 반영되며 오름폭이 커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11일 보고서에서 에너지 운송 불확실성에 따른 유가 상승이 시나리오별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1.0~1.6%포인트(p) 추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한은은 고유가 장기화에 따른 기대인플레이션 고착을 막기 위해 연일 신호를 보내고 있다.
유상대 부총재는 지난 4일 기자간담회에서 물가가 상당한 상방 압력을 받고 있다면서 5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 인상 시그널이 나올 수 있다고 언급했다.
금통위의 대표적 '비둘기파'였던 신성환 전 위원도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은 금리 인하를 논하기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유가가 계속 100달러 수준에서 고공행진하면 경제가 엄청나게 고통받는 한이 있더라도 유가로부터 2차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신 위원은 최근 국내 국고채 금리 상승에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이 어느 정도 반영됐다면서 "여기에는 '재정발' 인플레이션 우려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했다.
신 총재는 재정·통화정책 간 긴장 문제를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는 지난 2024년 7월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전 세계적으로 확장적 재정 기조가 자리 잡으면서 통화정책도 여기에 적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신 총재는 "때로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목적이 어긋날 수도 있다. 정책당국이 조율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위험"이라며 두 정책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28일 첫 금리 결정을 앞둔 신 총재로서는 정부의 재정정책과 조화를 이루는 통화정책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됐다.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정부가 재정정책을 효율적으로 펼치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성장률을 높이는 부분에 재정을 효율적으로 지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물가만 높이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반도체는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특수고, 우리나라는 저성장과 고령화 때문에 재정 지출은 계속 늘어나게 돼 있다"며 "이를 줄이지 못하면 국채 발행을 할 수밖에 없고 재정적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KDI는 앞선 보고서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정책은 국제유가 상승이 장기화하며 기대인플레이션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에 대비해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통화정책은 물가 안정에 보다 주력할 것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안재균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발표한 보고서에서 "현재 정부와 한은의 정책 공조는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며 "통화정책은 물가 안정 측면에서 운영되고, 확장 재정(추경)은 성장세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도 물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전날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물가 관리에 정부가 전력을 다해야 할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 금융시장 관계자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경기 전반은 예상보다 좋지만, 부문 간 격차나 높아진 물가상승률 등 상충하는 목표들이 있다"며 "정부도 경제 상황을 보면서 여러 정책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hs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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